네 로 Nero


정식 이름은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AD 50~54). 본명은 Lucius Domitius Ahenobarbus.

AD 37. 12. 15 라티움 안티움~68. 6. 9 로마.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AD 54~68 재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의붓아들이자 후계자였다. 방탕하고 사치하며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로마 시를 불태운 것으로 악명높다.

 

 

 

로마 제국 제5대 황제 네로(AD 54~68 재위)의 초상이 새겨진 세스테르티우스 청동화(AD 64~66), 지름 36㎜, 프랑스 리옹의 조폐국에서 주조, 런던에 있는 British Museum 소장

Reproduced with permission of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photograph, Ray Gardner for The Hamlyn Publishig Group Limited

네로(두상), 로마에 있는 Museo Nazionale Romano 소장

 

Anderson―Alinari from Art Resource/EB Inc.

 

성장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AD 40년경에 죽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증손녀인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 손에 자랐다. 아그리피나는 2번째 남편을 독살한 뒤,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가 되어 황제의 친아들인 정통 후계자 브리탄니쿠스를 제쳐두고 자기 아들 네로를 후계자로 삼도록 황제를 설득했으며, 황제의 딸 옥타비아를 네로와 결혼시켰다. 그녀는 황제와 결혼하기 전인 48년에 황제의 전처였던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살해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55년에는 브리탄니쿠스를 독살하는 등 네로를 권좌에 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고 자신을 반대하는 궁정 고문관들을 제거했으며 54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마저 독살한 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죽자마자 그녀는 자기 편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통해 근위대가 네로를 황제로 선포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원로원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으며, 로마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17세도 채 안된 소년에게 절대권이 넘어갔다.

 

집권 초기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즉위하자 항상 자신을 반대했던 막강한 해방노예 나르키수스를 제거했고 제국을 직접 다스리려 했다. 그러나 네로의 노스승인 스토아 철학자 루키우스 아나이우스 세네카와 부루스는 비록 아그리피나 덕분에 세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녀의 영향력 안에 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로가 자기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하도록 격려했고 결국 모자관계는 점점 냉담해졌다. 56년 아그리피나는 압력을 받아 은퇴했고 그때부터 62년까지 사실상 부루스와 세네카가 제국을 다스렸다.

네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54년 황제로 즉위했을 때부터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황제 앞에서 열리는 비밀재판이라든가, 부패한 해방노예의 지배 등 클라우디우스 황제 말년에 있었던 나쁜 관례들을 없애고 원로원에 더 많은 독립권을 허용했다. 당대 사람들은 네로를 두고 훌륭한 외모를 갖춘 미남이지만 부드럽고 나약한 성격에 침착하지 못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 묘사했다. 59년 이전까지 전기작가들은 네로에 대한 일화 가운데 자비롭고 너그러운 업적만을 인용했다. 네로 정부는 경기장에서 살육하는 시합을 금지시키고 세금을 내렸으며 사형을 금하고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예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네로 자신은 그를 비난하는 풍자시 작가들이나 심지어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민 사람들까지도 사면해주었으며 비밀재판을 거의 없앴고 반역죄를 다스리는 법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 40명을 처형했으나, 아그리피나가 꾸민 살인 음모를 빼면 54~62년까지 네로가 재위한 동안 그러한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네로는 검투경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시·연극·운동경기 경연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재난을 당한 도시를 원조했으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요청을 받아 유대인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예술적 자만과 무책임

부루스와 세네카는 자기들이 직접 제국을 다스리면서 네로가 무절제하게 취미와 향락을 즐기도록 내버려두었다. 세네카는 네로에게 독재권을 책임감있게 사용하도록 역설하기는 했지만 네로가 소년으로서 갖는 많은 일시적 충동들을 조절해 책임있는 행동을 하도록 하지는 못했다. 처음에 네로는 사형 선고에 서명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세금 징수원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것을 보고 58년에는 세금을 없애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뒤에도 그는 원정이나 공공토목사업과 같은 웅대한 계획을 생각해내기도 했으나 대부분 개인의 향락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자기의 지위를 이용했다. 일찍이 56년부터 네로가 밤에 길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소문이 떠돌기는 했지만, 네로의 야만적인 행동은 59년 자기 어머니를 살해했을 때부터 62년 6월 아내 옥타비아를 죽였을 때까지 35개월 동안 드러났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에 격노해 비이성적 행동을 한 대가로 살해당했다. 또 네로는 원로원 의원 오토(나중에 황제가 됨)의 젊은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사랑에 빠진 뒤, 옥타비아를 버리면 궁정과 민중들이 불만을 품을 것을 두려워하여 옥타비아를 살해했다. 네로는 62년 포파이아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65년에 죽고, 그뒤 귀족 출신의 스타틸리아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네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질책이나 징벌을 받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과도한 예술적 자만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시인이며 2륜전차 기수이자 수금연주자라고 자부했으며, 59년(또는 60년)에는 대중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그뒤 그는 연극무대에 등장했으며, 극장측은 그가 갖가지 배역을 맡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로마인들은 그의 이런 기괴한 행위를 품위가 없고 범절에 어긋난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네로는 심지어 자신의 시적·음악적 재능을 펴기 위해서 왕위를 버리겠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63년경부터는 이상한 종교적 열성을 보이기 시작해 새로운 종파의 설교자들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었고 그무렵 세네카는 네로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62년 부루스가 죽은 뒤 은퇴했다.

64년 로마를 휩쓸었던 대화재로 그간의 네로에 대한 나쁜 평판이 드러났다. 화재로 도시가 파괴된 것을 이용해 네로는 로마를 그리스식으로 재건했으며, 로마 시 전체의 1/3 크기인 궁전 ' 황금저택'을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 네로는 로마에서 56㎞ 떨어져 있는 안티움 별장에 있었기 때문에 화재에 책임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네로가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맞게 로마를 다시 지으려고 직접 불을 냈다고 오해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 Annals〉와 로마의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의 〈네로 Nero〉에 따르면, 네로는 대응책으로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돌리려 했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을 여러 가지 나쁜 행위에 가담하는 무리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교도들을 유대인과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뜻하지 않게 네로는 심한 그리스도교도 박해정책을 시작한 장본인이 되었으며, 이때문에 그리스도교 외경(外經) 전설에서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나쁜 평판을 얻었다.

 

다가오는 종말

그동안 로마는 동방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넓혔는데 당시 대외정책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아르메니아였다. 사이가 나쁜 동방의 파르티아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집권 뒤부터 아르메니아에 속왕을 임명해 그곳을 완충국가로 삼는 정책을 써왔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황제 말년에는 파르티아의 왕자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인의 지지를 받아 아르메니아 왕이 되었다. 이에 대응해 네로 정부는 유능한 장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를 사령관에 임명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66년까지 코르불로는 군사작전을 수행해 새로운 타협을 하게 되었는데, 티리다테스는 왕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네로에게서 왕관을 받기 위해 로마로 와야만 했다.

그러나 네로는 궁전과 건물의 신축, 총애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선물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속주의 금고를 강탈했기 때문에 속주는 점점 안정을 잃기 시작했고, 선물 비용만도 연간 군사비용의 몇 배에 이르는 20억 세스테르케스가 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60년(또는 61년)에 브리튼 섬에서 부디카(보아디케아) 여왕이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66~70년에는 유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무렵 궁정에는 황제 반대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원로원 의원에서 에퀴테스(기사)·장교·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에 걸쳐 있었는데 이런 반대세력들이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황제로 세우려는 대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음모자들의 노예들이 음모 사실을 네로에게 알려주어 위험을 면했으므로 네로는 겁을 먹지 않았지만 음모에 군장교가 가담했다는 것은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이 사건에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피소 음모사건에 관련된 41명 가운데 겨우 18명이 두려움으로, 또는 명령에 의해 자살했고(세네카와 시인 루카누스 포함), 나머지는 추방되거나 사면되었다.

66년말 네로는 그리스 여행을 하여 15개월 동안 로마를 떠나 있으면서 해방노예 1명에게 집정정치를 맡겼다. 이 여행중에 그는 새로운 예술적 면모를 보여주었고 헝클어진 머리에 고행자 같은 옷차림을 하고 맨발로 돌아다녔으며 그리스 문화에 열정을 품고 과거의 영광을 기리는 뜻에서 많은 그리스 도시를 해방시켰다. 68년 2월 로마로 돌아왔는데 그뒤 4개월 동안 예술과 종교를 광적으로 숭배해 원로원 의원과 그에게 재산을 빼앗긴 귀족들에게서 반감을 샀다. 게다가 대부분의 군장교들 역시 이탈리아 중류층 출신들로 보수적인 도덕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네로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기온(군단)의 일반 군인들까지도 카이사르의 후손이 무대에 올라 대중들 앞에서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나 또는 훨씬 더 비천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네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레가투스(속주 부총독)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는 "나는 그가 무대에서 임산부역과 처형당하는 노예역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스페인 속주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갈리아 리옹(프랑스 지방) 총독 율리우스 빈덱스, 그밖에도 동부 변경지역의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소식을 듣고 네로는 대응책을 취하지도 않고 코웃음만 쳤을 뿐 과대망상적인 과시에 더욱 몰두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네로는 "갈리아에 다시 한번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내가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다. 그동안 반란은 더욱 널리 퍼졌으며 레기온은 갈바를 황제로 추대했고 원로원은 네로에게 십자가에 달려 채찍에 맞아 죽는 형을 내렸다. 근위대는 그를 버렸으며 그를 섬기던 해방노예들은 네로가 로마 항구 오스티아에 준비해둔 배를 타고 달아났다. 네로는 로마 시에서 도망해야만 했는데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타키투스가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꾸며낸 이야기인 것이 거의 확실함), 네로가 그리스 섬에 도착했으나 이듬해(69) 붉은 머리를 한 거지 왕초이자 예언자로 변장한 그를 키트노스의 총독이 알아보고 체포해 원로원이 선고한 대로 형에 처했다고 한다. 뒤에 로마 민중과 근위대는 그처럼 진보적인 황제를 잃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신하들에게 네로는 대체로 폭군이었고, 그의 실정 때문에 일어난 반란은 잇따른 내란을 몰고와 한동안 로마 제국의 존속이 위협받았고 전국이 혼란 속에 빠졌다.

李順珠 옮김


         <참고문헌>


"네로"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3n3922b>
[2002. 4. 20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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