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Antiochos Ⅳ Epiphanes

- BC 215?~BC 163 -

 

시리아의 왕(재위 BC 175∼BC 163)

별칭 :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現神王] / 국적 : 시리아 / 활동분야 : 정치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現神王]라고도 한다. 로마에서 14년간 볼모생활을 하였으며, 형 셀레우코스 4세가 죽은 뒤에 즉위하였다. BC 169년 이집트에 침입,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하였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이집트에서 철수하였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 심취하여 헬레니즘문화에 입각한 제국주의 국가의 통일을 꿈꾸어, 유대교를 박해하여 마카베오가(家)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유대에 하스몬왕조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만년에 박트리아와 파르티아를 회복하기 위해서 동방원정을 계획, BC 163년 원정 도중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뒤 셀레우코스왕조는 쇠퇴하였다.

 

 

내용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Antiochos Epimanes('狂人')라고도 함(Epiphanes는'신의 顯現'이라는 뜻).

BC 215경~164 이란 타바에.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175~164 재위).

그리스 문화와 제도를 장려한 군주로 가장 유명하다. 유대교를 억압한 결과 마카베오 전쟁을 야기했다.

초기 치적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의 셋째 아들로, BC 190~189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아버지가 패배하자 BC 189~175년 로마에서 인질생활을 했다. 이때 로마의 제도와 정책을 배우고 그것에 경탄했다. 그의 형제 셀레우코스 4세는 자신의 아들 디미트리오스와 그를 교환했다. 셀레우코스가 반란자 헬리오도로스에게 살해되자 안티오코스는 그를 내쫓았다. 시리아의 정정(政情)이 불안했던 이 시기에 이집트의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후견인들은 코일레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등 이전에 안티오코스 3세가 정복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시리아와 이집트 양측은 모두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BC 173년 안티오코스는 로마와 안티오코스 3세가 맺은 아파메아 조약(BC 188)에서 주기로 한 전쟁 배상금 나머지를 모두 갚았다(→ 색인 : 로마사, 고대 이집트).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먼저 침략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공격에 선수를 쳤다. 펠루시움과 카시온 산 사이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정복했다. BC 169년에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을 점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의 조카였으며(안티오코스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했음), 안티오코스는 로마가 간섭할 아무런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보호자 자격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형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게 대항 정부를 세우도록 간청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시리아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펠루시움에 강력한 부대를 배치하여 이집트에 대한 접근에 안전을 기했다.

 

BC 169(또는 168)년 겨울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는 안티오코스에게 모든 헬레니즘 왕국들에게 위험한 존재인 로마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의 형제, 누이와 제휴를 맺고 로마에 새로이 원조를 요청했으므로 안티오코스는 전쟁을 준비했다. 안티오코스의 함대는 키프로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키프로스의 총독은 그에게 섬을 넘겨주었다. 안티오코스는 BC 168년 이집트에 재차 침입하여 키프로스와 펠루시움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하(下)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기반은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2일 로마군이 피드나에서 페르세우스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치자 안티오코스가 거둔 승리는 빛을 잃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외 엘레우시스에서 로마 대사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놀란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안티오코스가 서 있는 땅 주위에 원을 그리고 그 원을 벗어나기 전에 명확한 답변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이같은 공개적인 모욕에 당황한 왕은 곧바로 요구에 따르기로 동의했다. 로마의 간섭으로 다시 현상유지가 이루어졌다. 이집트가 지배권을 주장했던 남부 시리아의 영유권이 허용됨으로써 안티오코스는 영토의 상실을 피할 수 있었다. 

왕국의 헬레니즘화 노력

그는 동방인들, 즉 비(非)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소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에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여 육성함으로써 경제적·사회적으로 왕국을 부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즉위하기 전에도 이미 안티오코스는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건설과 극장 장식에 헌금을 냈다. 그는 오론테스의 안티오크에 에피파니아(그의 이름을 본떴음)라는 구역을 새로 건설하여 시를 확장했다. 이 구역에다 도수관(導水管), 공회당, 시장,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게 바치는 사원을 세웠다. 그를 아시아의 '소테르'(해방자, 구제자)로 숭배하는 바빌론은 그리스인 식민도시가 되어 자유가 보장되었다. 또다른 에피파니아가 아르메니아에 세워졌다. 엑바타나(페르시아에 있음)도 에피파니아로 불렸고 그리스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여러 도시들은 그 내부에서 통용되는 동전을 주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페르시아 만에 있는 안티오크의 조폐소는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강 어귀 지역 사이의 해양무역에 기여했다 (→ 색인 : 바빌로니아).

 

안티오코스의 헬레니즘화 정책이 번성하고 있던 동양의 사원조직, 특히 유대 사원과 갈등을 일으켰다. 안티오코스 3세 시대 이래 유대인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다. 유대인은 두 파벌, 즉 종교적인 정통 하시드파(독실한 자)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했다. 재정상의 이유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개혁파를 지지했고, 상당한 자금을 받은 대가로 대제사장 야손에게 예루살렘에 김나시온을 세우고 젊은 층의 교육에 그리스 방식을 도입하도록 허락했다. BC 172년 안티오코스는 더 많은 공납을 받고 야손의 자리에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BC 169년 안티오코스가 이집트에서 전쟁중일 때 야손은 성채만 빼놓고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경쟁자 메넬라오스의 지지자들을 많이 죽였다. BC 167년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강습하여 탈환하고 헬레니즘화를 강화했다. 예루살렘은 특권을 박탈당하고 시리아군이 영구히 주둔하게 되었다.

유다스 마카베오의 반란

그리스인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안티오크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야훼 숭배와 유대인의 모든 의식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올림피오스의 제단을 세우고, 왕의 조상(彫像)을 우상으로 세우며 그 발 밑에 제물을 놓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신성 모독에 대항하여 반(反)그리스 유대인 지도자 유다스 마카베오는 게릴라전으로 하시드파 봉기를 일으켰고 수차에 걸쳐 안티오코스가 진압하라고 보낸 장군들을 무찔렀다. 유다스는 부분적인 사면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의 아크라 지구를 제외한 유대 지역 전부를 장악했다. 마침내 BC 164년 12월 제우스의 제단을 부수고 사원을 다시 정화할 수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확실히 하시드 운동의 힘을 과소 평가했다. 그 힘이야말로 약 1세기에 걸쳐 독립 유대 국가를 유지하도록 만든 배경이었다. BC 166년에 안티오코스는 안티오크 근처 다프나이에서 장대한 군사 열병식을 벌여 세상에 그의 힘을 과시했는데도 이때에 반란이 시작된 것을 보면 유대인의 투쟁정신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색인 :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열병식에는 2만 명의 마케도니아 방진군(方陣軍)과 로마 무기로 무장한 500명의 용병을 포함한 4만 6,000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8,500명의 기병과 306기의 장갑코끼리 부대가 따랐다. 그뒤 안티오코스는 제국의 동쪽을 위협하던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을 벌여 그 지역에서 세수입을 회복했으며, 그에게 등을 돌린 아르메니아의 아르탁시아스에게 종주권 인정을 강요했다. 또한 페르시아 만에 안티오크라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아라비아 해안에 원정대를 보냈다. 그는 BC 164년말 페르시스의 타바에(또는 가바에:지금의 에스파한으로 추정됨)에서 병으로 죽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엘람(지금의 이란에 있음)에서 나나이아 신전을 약탈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벌로 죽었다고 믿었다.

 

H. Volkmann 글

 

<참고문헌>

Antiochus IV of Syria : O. Morkolm, 1966

The King Is Dead : Studies in the Near Eastern Resistance to Hellenism B. C. 334-31 : S. K. Eddy, 1961

Der Gott der Makkabaer : E. Bickermann, 1937

The House of Seleucus, 2 vol. : Edwin Robert Bevan, 1902 (reprinted 1966)

 

☞ 스룹바벨 선교회 "작은 뿔"로 바로가기


Copyright (c) 2002  Mahershalalhashbaz All rights reserved.